Waking Life

avril 25th,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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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같은 시기에서는 정말 뜬구름잡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계속 « 질문 »만 던지기 때문이다. 등따숩고 배부른 시기에서야, 이런 « 질문 »은 하나의 레저/스포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생존이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그런 « 질문 »은 사치에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2000년, 닷컴거품 시기와 그 이듬 해 일어난 붕괴 시기에 이 영화가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것 같지도 않다. 편집의 실패, 라고 보면 될려나? 자꾸만 중심을 흐트러뜨리는 식의 구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미국 사회의 배부른(그리고 착한) 사람들이 뭔 고민을 하는지는 알기 쉽겠지만.

물론 «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고 말할 수는 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삶에 정답이란 없으며, 계속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인간스럽지 못하잖나, 뭐 그런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다. 당연히 의미가 있긴 있겠지.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본능적인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 탈이라면 탈이겠다.

그동안 신만 줄줄 따라다니던 서양애들이 애비애미를 잃고 방황한다는 걸 알려주는 좋은 영화라면, 그것만은 나도 끄덕일 수 있겠다. 철학으로 역사를 만든 우리 수준에는 못미치는 것들의 영화, 그리고 거기에 열광할 줄 아는 사람들의 영화이겠지.

Be Kind Rewind

février 20th,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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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면 왠지 스산한 느낌이 들지 않던가? 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제 갈 때까지 갔구나. 앞으로의 세상을 알 수가 없구나. 법률이 사람을 돕지 못하고, 항상 악역만 맡게 되는구나. 이런 따뜻한 영화가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스스로가 따뜻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없으니까, 만든다.

바로 그 정신(?)이다. 영화 주인공들도, 없으니까 만들기 때문이다. 신도 아마, 자신의 대척점, 인간이 없으니까 만들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물주와 인간은 동등하다는 얘기도 된다. 신의 간택이나 고민하는 양놈들은 만드는 것 외에 확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직접 내려왔지.

하지만 스산한 느낌은 여전하다. 없으니까 만드는 건 맞는데, 없다는 것. DVD가 점령한 시장에서 앞으로 더 바랄 게 없다는 걸 굉장히 따뜻하게 그려내서 더 느낌이 춥다. 저런 식의 비디오 가게는 앞으로 사라질 것이다.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희망으로 얘기하는 커뮤니티-메이드 영화가 될 수는 없다. 돈/생존이 결부되는 한 어쩔 수 없다.

Eastern Promises

décembre 12th, 2008 - 

VM

비고 모르텐슨과 뱅상 카셀(VM과 VC라고들 표현하더라)이 이렇게 러시아어를 잘할지 몰랐다, 고 한다면 좀 어폐가 있긴 하다. 나는 러시아어를 모르니까.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러시아 마피아의 모습에 대해 여기 저기 찾아보니까 칭찬이 줄을 잇더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로넨버그의 이 영화를 비교하려면 « 폭력의 역사« 를 빗대어 봐야 한다. 결국, 평화도 폭력의 준비상태를 뜻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가령 여주인공의 집안은 과연 평화롭다고 할 수 있나. 술주정뱅이 삼촌이 말로 하는 건 폭력이 아닌가? 멋대로 아이의 가족을 찾아줄 마음으로 가득한 안나 이바노바(이반의 딸 안나의 의미, 러시아식 이름 중간에는 항상 아버지 이름이 들어간다)는 과연 그 아이에게 ‘사랑’으로 대한 것일까? 타자가 곧 지옥(L’enfer, c’est les autres.)이라 말했던 사르트르(맞나?)의 말이 실로 옳다. 그가 말한 타자는 다름 아닌, 관심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관심과 사랑이 폭력이라는 얘기다. 달라 보여도 흑백동색이다. 이점을 이해 못하면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가 당황해하는 인생일 수밖에 없다. 관계라는 것을 아예 맺지 않으면, 다 끊어버리면 과연 폭력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뭐, 알고도 행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못산다.

카나다 퀘벡 쪽은 이 영화 제목을 « Promesses de l’ombre »으로 개봉했다고 한다. 어쩌면 영어 원제목보다 이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シーサイド百道(시사이드 모모치)

septembre 3rd, 2008 - 

후쿠오카의 인공해변, 시사이드 모모치이다. 인공해변.이라고 하기는 좀 뭐한데, 아무튼 후쿠오카에서 처음 조성하여, 나중에 동경의 오다이바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과연 어느 정도나 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 있을련지는 모르겠지만, 성공이라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은 저녁 무렵에 찍었다. 후쿠오카 타워를 올라가기 직전이었고, 실제 저 해변의 좋아 보이는 곳들은 모두 ‘예약’된 상태였다.

그런데 뭐, 저런 거 쳐다보고 있으면 내게 있어서 여행이란 무엇인가?라는 시덥잖은 질문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난 관광과는 꽤 거리가 먼 사람이다. 풍경이 있으면 그저 쳐다보고 말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루 종일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힘들기도 해서이다. (물론 체력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냥 보고나서, 음. 좋군.하면 끝이다. 여행생활자(!)가 아닌, 그냥 생활자에 불과한 나이다. 이 시사이드 모모치도 좋았다. 끝. ㅎ

그나저나 여행은 내게 좋은 추억도 있고, 안 좋은 추억도 있고.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여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때도 종종 있으니 참 뭐하다. 그냥 냅두는 것이 해법이다. 냅둔다. 비단 여행만은 아닐 것이다.

The Dark Knight

août 25th, 2008 - 

조커는 이른바 ‘사회 게임’이라는 것을 벌였다. 배 두 척 간에 서로 연락을 못하게 해 놓고, 그와 동시에 서로 죽일 수 있게 조치해 놓은 것이다. (즉, 협조는 불가능하고, 반복 게임도 불가능하다.) 완벽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다. 답변은 간단하다. 사람들은 모두 기다렸고, 그로 인해 모두들 살아남는다. ‘합리적 선택’ 중에 하나이지, 사람들이 선해서가 아니다. 서로 누르지 않으면 살아난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공감했을 뿐이다. (이걸 선함과 신뢰의 징표로 삼는다면, 그것은 관객의 감동을 위해서일 뿐이다.) 합리적 선택은 두 가지인데(둘 다 누르는 것, 혹은 둘 다 안 누르는 것), 이들은 둘 다 안누르는 것을 확률 1로 선택하였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조커에게 또 하나의 기폭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즉, 정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커가 실제로 눌렀건 안 눌렀건 상관 없이, 사람들이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면(즉, 조커에 대해 어느 정도 어떤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더라면), 분명히 두 배 중 하나는 침몰하거나, 둘 다 침몰하였다. 조커가 실패한 것이다. 조커는 더 많은 범죄를 일으켜서 자신이 어떤 존재임을 충분히 시민들에게 인지시켰어야 했다. 고담 시의 규모가 너무나 커서(인구 3천만!), 충분히 인지를 못시켰던 모양이다. 어찌 됐건, 사람들은 지극히 자신에게 이로운,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영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째서 사람들은 ‘합리적 선택’을 선.이나 신뢰.라는 가치로 환산시킬까이다. 어차피 선악은 어떠한 가치도 갖지 못한다. 생존과 나름의 부가가치만이 의미를 갖는다. 즉, 이것이 윤리적 가치라는 인식을 할 때, 자신의, 혹은 집단의 효용이 올라갈 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사회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유지시켜주는 자발적 강제력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모두들, 자기들도 모르는 채 Pareto 효율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그걸 모르는 이들이 공동선에 애써 감동받는다. 아니, 그 편이 더 좋고 편하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사회성을 지켜주니까 말이다.

배트맨이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편하게 배트맨 노릇을 할 테지만, 그런 배트맨은 영화의 흥행에 별 도움이 안 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즉, 요점은 합리성이다.

* 참고 : 게임이론적 분석에 대해서는 친구 N의 블로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