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조약(Traité de Dunkerque)과 브뤼셀 조약(Traité de Bruxelles)

mars 23rd,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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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문제는 독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은 결국, 전세계 대 독일의 전쟁 구도였기 때문이다. 이런 독일을 가만 놔두면 안될 일이었다. 그래서 동서독 분할, 베를린 분할(및 봉쇄)이 일어났지만, 제일 큰 피해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생각한 것은, 독일이 다시 일어났을 때 자동적으로 군대를 동원하는 체제였다. 그래서 양국 외교부장관이 출동한다. 비도와 베빈이었다.


1. 조르주 비도 (Georges-Augustin Bidault)

원래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뮌헨 협정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드골의 눈에 띈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4공화국은 물론 드골도 그를 외교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나중 일이지만, 알제리 독립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허망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드골보다도 더 우파라 볼 수 있겠다.

2. 어니스트 베빈 (Ernest Bevin)

비도와는 달리 베빈은 노동당, 즉 좌파였다. 하지만 처칠이 계속 휘두르던 전시내각에 참여했었고, 처칠 사임 이후 노동당 내각에서 외교부 장관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수당의 정책과 별 차이가 없는 정책을 계속 펼쳤고, 상당한 반공주의자였으며, 한국전쟁 때도 영국의 참전을 이끌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유대인이 주도하는 이스라엘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3. 브뤼셀 조약

비도와 베빈은 우파와 좌파였지만, 사고방식에 별 차이가 없었고, 둘 다 똑같은 반공주의자였다. 그렇다면 굳이 독일만 상대로 할 것이 없잖을까?라는 것이 둘의 결론이었다. 사실 당시 서독이야 미군이 대량으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 입장에서 덩케르크 조약은 미국의 의심만 살 뿐이었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때문에 미국에게 엄청난 빚을 지게 된 상태였다. 즉, (1) 두 나라만의 군사동맹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되었고(주변국은 여전히 영국 제국과 프랑스 제국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2) 두 나라는 모두 파산 상태였으며, (3) 소련은 조약 놀이를 하는 와중에 동유럽을 계속 ‘접수’하고 있었다.

브뤼셀 조약의 탄생 배경이다.

브뤼셀 조약은 기존 덩케르크 조약에 더해서, 베네룩스 3국이 들어갔다. 비도와 베빈, 그리고 벨기에의 Paul-Henri Spaak과 네덜란드의 Carel Godfried van Boetzelaer van Oosterhout, 룩셈부르크의 Joseph Bech이 모여서 맺은 조약인데, 이 5명의 외무장관들은 NATO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브뤼셀 조약은 덩케르크 조약이 갖고 있던 공동안보 외에, 파산 상태에 빠진 서유럽국가들끼리 서로 돕자는 의미로, 사회, 경제적인 조항도 집어넣게 된다. 즉, 안보 부문을 따로 떼어놓고 논의를 해야 하는 상태가 되는데, 이는 곧 독일 처리 문제와 새로운 안보기구(조약이 아닌 상설기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로 이어진다.

3 Responses to “덩케르크 조약(Traité de Dunkerque)과 브뤼셀 조약(Traité de Bruxelles)”

  1. Minsuk Han dit :

    아니 이게 얼마만의 포스팅입니까. 많이 많이 올려주셔요. 형님의 지혜와 혜안이 필요합니다. ㅎ 잘지내시죠?

  2. casaubon dit :

    지혜와 혜안은 무신. ㅋㅋ 언제 시간 내렴. 나보다 네가 더 바빠보여 -0-;

  3. Minsuk Han dit :

    저 안바쁜데요, 시간 많아요. 형은 매일 매일 늦게 까지 일하시는 것 아닌가요? ㅋ 어디로 찾아갈까요, 트윗 DM 날려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