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어권에서 담배를 사면, « Fumer tue »라는 경고문이 쓰여있다. 가령 한국에서 담배를 살 경우, « 흡연은 암을 유발할 수 있으며 등등 »과 같은 어구다. 흡연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어구를 패러디한 것이 저 제목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내용은 더욱 더 심상치 않다.
작가의 이름이 이 책에 실제로 등장하는 이름(가령 돌로레스 자메?)이었다면 완전히 속을 만하다. 불어권에서야 책을 편찬할 때 알아보기 쉬운 위치에 « roman »이라 쓰여 있다. 소설이라는 의미다. (영어권에는 fiction이란 말이 쓰여 있던가?) 진짜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 소설은 소설이라는 명칭이 잘 안보이는 곳에 쓰여져 있다. 물론 이것은 지엽적인 얘기다. 실제 내용을 보면 이 소설의 내용은 정신병리학자의 의사록? 이랄 수 있다.
즉, 너무 많은 사랑은 지배자와 종속자 간의 관계를 극명하게 대비시킬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에, 사랑이 결국은 상대방을 «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 죽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이다. 책에 나온 여덟 편의 이야기는 모두 극단적이랄 수 있고, 과장된 사례랄 수도 있겠다. 편지 하나에 자살할 사람이 몇이나 되리오? 그러나 독자의 마음 속에는 폭풍이 몰아치게 된다. 주변의 이야기, 자기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하게 사랑하려면(?) 하나의 감기처럼, 짧게 짧게 지나가야 좋을 것이다. 사랑을 병으로 보는 시각이 더 올바르다는 말일까?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발언은 귀엽게 넘어가줄 수 있겠지만, « 그놈의 지긋지긋한 사랑 »때문에 피해가 막심해지면 더 이상 사랑을 사랑의 문제로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뭘 해야 하나? 자기를 잊지 않으면 되나? 그럼 사랑이 안될긴데? (이 또한 세뇌인가?)


사실 이 책이 ‘미녀와 야수’에서 모티브를 따서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이야기를 밀고간다는 인상을 주지만, 노통브는 역시나 보다 더 근본적이다. 에피판이 추남이라서, 에텔이 미녀라서. 라고 보면 참 간단하긴 하다. 그러나 에피판은 톱모델이 되었고, 에텔은 에피판에 보기에 형편 없는 작자와 사랑에 빠졌다. 남은 것은 팩스 뿐이다. 팩스 방어, 혹은 팩스 공격 뿐이다.
대화로만 이뤄진 책이 새로운 장르는 아니며, 특이한 장르도 아니다. 고대 세계 때부터 대화식의 문답글은 언제나 있어왔고, 서양의 예를 따져볼 것도 없이 동양 고전 문헌도 대화법을 따른 예가 많다. 공자 맹자 관련 책들도 그러하니까. 지금 떠오르는 책으로는 리마두의 천주실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