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죽는다 (Aimer tue)

décembre 27th, 2009 - 

Aimer tue

불어권에서 담배를 사면, « Fumer tue »라는 경고문이 쓰여있다. 가령 한국에서 담배를 살 경우, « 흡연은 암을 유발할 수 있으며 등등 »과 같은 어구다. 흡연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어구를 패러디한 것이 저 제목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내용은 더욱 더 심상치 않다.

작가의 이름이 이 책에 실제로 등장하는 이름(가령 돌로레스 자메?)이었다면 완전히 속을 만하다. 불어권에서야 책을 편찬할 때 알아보기 쉬운 위치에 « roman »이라 쓰여 있다. 소설이라는 의미다. (영어권에는 fiction이란 말이 쓰여 있던가?) 진짜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 소설은 소설이라는 명칭이 잘 안보이는 곳에 쓰여져 있다. 물론 이것은 지엽적인 얘기다. 실제 내용을 보면 이 소설의 내용은 정신병리학자의 의사록? 이랄 수 있다.

즉, 너무 많은 사랑은 지배자와 종속자 간의 관계를 극명하게 대비시킬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에, 사랑이 결국은 상대방을 «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 죽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이다. 책에 나온 여덟 편의 이야기는 모두 극단적이랄 수 있고, 과장된 사례랄 수도 있겠다. 편지 하나에 자살할 사람이 몇이나 되리오? 그러나 독자의 마음 속에는 폭풍이 몰아치게 된다. 주변의 이야기, 자기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하게 사랑하려면(?) 하나의 감기처럼, 짧게 짧게 지나가야 좋을 것이다. 사랑을 병으로 보는 시각이 더 올바르다는 말일까?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발언은 귀엽게 넘어가줄 수 있겠지만, « 그놈의 지긋지긋한 사랑 »때문에 피해가 막심해지면 더 이상 사랑을 사랑의 문제로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뭘 해야 하나? 자기를 잊지 않으면 되나? 그럼 사랑이 안될긴데? (이 또한 세뇌인가?)

머큐리 (Mercure)

août 24th, 2008 - 
Tags: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스포츠, 바캉스, 스펙터클과 똑같은 삶의 디테일에 불과하죠. 그들이 선택한 삶에 사랑이 맞아떨어져야 하지.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고, 여자에게는 아이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은 짧을수록 바람직한 하나의 통과 의례, 하나의 질병일 수밖에 없소. 그래서 열정의 일시적인 성격에 대한 치료용의 일반적인 논거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요.

처음 읽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구절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읽어보니 보인다. 그리고 상당히 뇌리를 때리는 구절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짧을수록(?) 바람직(!)한 것이었구나. 그렇구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구나. 저, 하나의 ‘질병’이라는 말은, 하나의 ‘징후’로도 들린다. (여기서 수잔 손탁이나 지젝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나아가면 좀 웃기지 않을까.) 사랑은 하나의 징후일까? 그래서 더욱, 더 치료, 혹은 예방(!)이 필요할까? 낫고 나면, 사라져 버리니까?

그렇다고 사바세상의 사랑을 죄다 부르주아의 씨받이 만들기로 봐서도 좀 웃기긴 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처녀에게 괴물 손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요’라는 말이 나온다. 워낙에, 아무도, 없어서다. 괴물이 수가 많다면 그건 괴물이 아니다. 어차피 사랑은 인류의 전공(spécialité)이 아니다.

공격

septembre 21st, 2007 - 
Tags:

많이 안읽어봤다는 건 거짓말에 가깝고, 일본 문학, 특히 현대 문학(무라카미도 포함! ㅇ_ㅇ!)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이 안 읽는다. 어딘지 모르게, 아니, 알 것도 같은데 근본이 얕아서다. 아니, 나름대로의 근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만, 나쯔메 소세키처럼 전쟁 전, 많이 봐줘서 미시마 유키오 정도만이 마음에 든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근본은 마응 속 깊숙이가 아니다. 뼈 속, 창자 속, 자지 속 깊숙이 박혀 있는 흐물흐물하고 축축한 구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말 잘 표현하는 작가가 노통브다. 제목 봐라. 공격(Attentat: 불어 단어에서는 ‘테러’의 뜻으로도 쓰인다)이다. 공격. 어디서 많이 보던 단어 아니신가? ㅎㅎ

downloadblog.jpg사실 이 책이 ‘미녀와 야수’에서 모티브를 따서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이야기를 밀고간다는 인상을 주지만, 노통브는 역시나 보다 더 근본적이다. 에피판이 추남이라서, 에텔이 미녀라서. 라고 보면 참 간단하긴 하다. 그러나 에피판은 톱모델이 되었고, 에텔은 에피판에 보기에 형편 없는 작자와 사랑에 빠졌다. 남은 것은 팩스 뿐이다. 팩스 방어, 혹은 팩스 공격 뿐이다.

공격. 요거 하나면 세상 만사를 설명할 수 있다. 황소뿔로 상징을 지을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도, 추함과 미녀의 극렬한 대비 정도가 아니다. 그것 또한 공격이 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공격과, 아름다움의 공격이다. 아름다움은 범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범한다가 곧 공격이기 때문이다. 원제목 어감을 생각하면 ‘테러’라 해도 무방하다. 공격을 해야, 공격을 받아야 미학적으로 아름답다. 그래야 죽음으로 완성지을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까? 생각해 보면, 동화, 미녀와 야수도 어느정도 그런 성향을 내비쳤던 것 같다. 사람 안에, 관계 안에는 공격밖에 없고, 그것을 예의로 감싸기도 하고 사랑으로 감싸기도 해서이다. 에피판은 공격을 하여 아름다움을 자기 안에 간직하였다. 사실 처음과 끝에서, 달라진 것이라고는 없다. 타고난 공격성.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공격성. 공격하지 않으면 방어할 수 없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성이다.

꽤 무서운 책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을 바라는 것.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만큼 폭력을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시간의 옷

juin 2nd, 2007 - 
Tags:

소설 안에서 셀시우스는 단정내렸다. 결국은 자신을 지지하리라고. 그리고 그 말이 맞음을 깨닫는다. 남북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둘 중 하나의 소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c0060024_22254032.jpg대화로만 이뤄진 책이 새로운 장르는 아니며, 특이한 장르도 아니다. 고대 세계 때부터 대화식의 문답글은 언제나 있어왔고, 서양의 예를 따져볼 것도 없이 동양 고전 문헌도 대화법을 따른 예가 많다. 공자 맹자 관련 책들도 그러하니까. 지금 떠오르는 책으로는 리마두의 천주실의가 있다.

그렇다면 왜 대화를 할까? 이 소설에 나오는 아멜리와 셀시우스는 왜 대화를 할까? 셀시우스는 비밀폭로를 막기 위해 1995년의 아멜리를 데리고 왔고, 아멜리는 26세기 사람인 셀시우스를 통해 20세기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를 듣고 보면, 정말 셀시우스가 말하는 26세기가 훨씬 ‘합리적’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것이야 악명 높고, 과두체제가 이끌어가는 것, 다수의 중간층이 십자말풀이에만 골몰하는 것은 유머가 아니라 당장 지금의 현실이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멜리는 터무니 없다 말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셀시우스는 ‘책임을 지는 시대’가 바로 동시대라며 자기 시대를 변호한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이들의 대화를 읽어보면 분명히 셀시우스가 말하는 26세기가 역시 옳은 사회다. 그가 하는 말이 옳다. 남쪽의 소멸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방법이다. 프랑스 학술원 회원들의 집단자살 얘기도 흥미롭다. 하지만 그 사회가 땡기지 않음은 분명하다.

아멜리 노통브는 현재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셀시우스를 등장시키지 않았다. 풍자도 풍자이지만, 곧 서양문명, 즉, 서방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부러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까? 바로 합리성의 비합리성이다. 합리적인 것은 곧 비합리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수학으로 풀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역시 동양 고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살았던 노통브는 그 점을 아마 잘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