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ò o le 120 giornate di Sodoma

avril 28th,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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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할 말이 아주(X100) 많다. 파솔리니가 이 영화를 찍자마자 총 맞아 죽은 만큼, 자세히 봐 줘야 예의이기도 하겠지만, 설사 그러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면 하나 하나를 음미해야 할 필요가 있고, 또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생각해 보면, 여전히 수수께끼 중 하나라 일컫는 파솔리니의 죽음은 ‘희생’일 수도 있겠다. 현대 서유럽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순교한 사람은 그 사람 하나뿐일지도 모른다.

우선 이 두 사진을 보시라. 주인공(!)들의 총에 맞아 죽은 꼴라보의 모습이다. 그는 흑인과 동침하다가 걸렸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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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살로의 저택에 희생자들을 감금하면서 나왔던 규칙이 있다. 남녀가 섹스하면 벌(죽음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을 받는다였다. 처음부터 흑인 하녀와 눈이 맞았던 그가 벌을 받을 것임은 이미 시사가 된 바였다. 생각해 봐야 할 점이 많다.

  1. 하필이면 왜 남녀가 섹스하면 벌을 받을까? 남녀간의 섹스가 제일 보편적이라서, 재미가 없어서가 아닐까?
  2. 그가 적발된 과정은 코메디에 가깝다. 그것도 작은 위반에서 점차 큰 위반으로 나아간다. 변명도 한결같다. 더 큰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 비밀이란 것이 결국 남녀간의 섹스였다.
  3. 그 대상이 흑인 여자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4. 그는 죽기 직전에 왼손(오른손이었나?)을 하늘 위로 주먹쥐고 쫙 폈고, 그 상태에서 총을 맞았다. 60년대 말, 파솔리니가 혐오한(!) 학생 시위대의 모습이 그러했다.

이 영화는 남녀 간의 섹스장면을 전혀 내보내지 않는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의 섹스 뿐이다. 왜일까? 결국 코메디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편은 곧 코메디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흑인 여자가 갖는 지위, 그리고 주먹쥔 손을 쫙 하늘로 편 상태로 죽었다는 점이다. 언제나 서유럽에게 뜯어 먹히기만 한 흑인, 그리고 여자라는 존재가 백인 남자와 감히(!) 섹스를 했으니 죽어 마땅하게 된다. 혹 오델로도 그렇게 봐야할지 모르겠는데, 한 명도 아닌, 주인공 모두가 그를 응징한다는 데에서, 그렇게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로 곧게 편 상태가 저항하는 자의 데모를 연상시키는 한편, 파시즘/나치즘의 인사 형태도 연상시킨다는 데에 있다. 둘은 같은 것일까? 저항과 압박이 좌우 대칭을 이룬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편하게 바라볼 장면이 아니다. 파솔리니는 그를 그냥 총 맞아 죽게 내비 둘 수도 있었다. 그가 세상에 대해 느낀 피로감을 생각해 보면, 이런 장면은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일 수 있겠다.

이것 외에도 많다. 그 만큼, 대단한 영화다.

Salò o le 120 giornate di Sodoma

avril 25th,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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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 소돔 120일은 저작권 소멸이 된 고전(!)이라서인지, 온라인으로 올라와 있다. 늘상 대출중(…)이라면 온라인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난 아직 보지 못하였다. 틈이 나면 읽어야 하겠지만, 읽어야 할 책은 언제나 많다.

불어판
영어판

예전 로그 찾다 보면 나올 텐데, 사실 이 영화는 모로코 살 때 텔레비전 방송(!)으로 봤었다. 불어판이었고, 정말 인상 깊은 영화였다. ㅎㅎ 그래도 한글 자막으로 다시 보니까 확실히 알겠다. 과연 이 영화는 문제작이 맞다. 감독이 이것을 찍고 살해당할 만 하다.

Salò o le 120 giornate di Sodoma
실제 영화에는 안 나온 장면이다

그런데 모두들 이 영화가 나찌 치하, 즉, 파시스트 치하를 풍자한 내용이며, 권력의 타락이 어디까지인가를 논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파솔리니라면 그 정도로 끝낼 위인이 아니다. 이런 대사가 있다.

L’unica vera, grande, assoluta Anarchia, è quella del potere.
« 진정한, 위대한, 절대적인 무정부주의만이 바로 권력일세. »

파시즘과 무정부주의는 연관을 짓기가 사못 어렵다. 그리고 당연스레 우리는 둘 모두를 ‘악’으로 간주한다. 파솔리니가 파시즘을 싫어한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파시즘을 싫어한다’는 것 자체를 의심스러워 한 것도 당연하다.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도 권력이며, 무정부주의는 형용모순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남는 것은 쾌락 추구, 행복 추구이다.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 모두가 평온해지면 만사 OK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네 명의 권력자(성직자와 사업가, 판사, 귀족)는 권력을 갖고 자신의 행복에 그 권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이들이 남자 역할만 한 것도 아니다. 이들은 동성애에 있어서 여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즉,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죽박죽이 되는 상황도 여러 번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마지막의 학살이 상황을 뒤엎기는 하지만, 파솔리니의 의심은 여전하다. 그것을 알아차려야 이 영화를 음미할 수 있잖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은 장면이 유튜브에 있어서 임베딩한다.

Che cosa sono le nuvole?

avril 19th,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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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이다. 오델로가 묻는다.

“Iiiiih, che so’ quelle? » (이이이… 저건 뭐지?)

이아손이 답한다.

“Quelle… Sono le nuvole. » (저거… 구름이야.)

다시 오델로가 외친다.

“E che so’ le nuvole?” “Quanto so’ belle! Quanto so’ belle!” (구름은 또 뭐지? 너무 아름다워! 너무 아름다워!)

대단히 독특한 단편 영화다.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를 완전히 비틀어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연극 형식을 취한 이 영화는 마리오넷트들이 출연자들이다. 마리오넷트? 다음의 영상을 보시라.

Che cosa sono le nuvole?

유뷰브에 올라온 « 구름이란 무엇인가 »

즉, 인형들이 살아 숨쉬면서, 오델로를 연기한다. 연기만 하랴? 이아손의 배신을 지켜보는 오델로 인형(!)은 이아손이 좋은 인형인줄 알았는데 나쁜 인형이었다며 기분나빠하기도 한다. 무대 뒤에서 말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아손의 배신과 오델로의 부인 살해 시도 장면이 나오게 되자, 연극을 구경하고 있던 청중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이들을 « 죽인다. » 그리고 곧 « 버려진다. » 쓸모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발상 자체가 정말 놀랍다. 역시 파솔리니!를 외칠 수 밖에 없다. 인형술사를 신이라고 하면 될까? 신이 움직이는대로 인간들이 움직이고, 민중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신은 보고만 있다. 아니, 오히려 처리에 앞장선다. 오델로의 비극과 인간의 비극이 나선형을 이룬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을 바라보는 다른 인형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묶여 있다.

다시 위의 마지막 대사로 되돌아가보면, 구름의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인생에 남는 것이라고는 정의를 인간이 내리는 세상이 아니라, 오로지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뿐이라는 교훈일까? 희극론이 아닌 비극론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도, 사실 그런 면이 있잖을까 싶다.

구름은 정말 아름답다. 내가 지금 서울에서 보아도 말이다.

I Racconti di Canterbury

avril 13th,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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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파솔리니가 직접 초서로 출연할지는 몰랐었다. 그리고 그는 출연하는 내내 미소짓는다. 때로는 졸면서, 하품하면서, 즐기며 이야기를 작성한다. 실제로 초서가 캔터배리 이야기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꽁트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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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삶의 교훈도 그득하다. 가령 동성연애 혐의로 적발된 두 남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한 남자는 돈을 줘 곤경에서 벗어나지만, 돈이 없던 다른 남자는 곧바로 화형을 당하게 된다. 주제를 벗어나자면(!) 어째서 그 때에 동성애를 탄압했는지도 생각해 볼 만할 것이다. 당시의 동성애는 돈으로, 혹은 권력으로 사야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고, 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할 것이다.
I Racconti di Canterbury

즉, 돈이 없는 보통 호모들은 고을(!) 생산력 증대에 힘쓰기 위해, 처벌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원래부터 육체 노동을 하지 않는 계급이야 호모이건 양성이건 상관이 없다. 쓰다보니 이게 영화와 영 관련이 없지는 않다. 글을 아는 자와 글을 모르는 자와의 한판 승부도 예정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책 자체가 글이 아니면 개념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으니, 글 쓰는 자, 즉, 초서의 시각이 짙게 배어있다. 아무리 모르는 자에 대한 애정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글 읽는 자들의 자그마한 승리가 계속 배어나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파솔리니의 승부가 나온다. 파솔리니 자신도 시인에 소설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감독이다. 그것도 종합 예술인 영화 감독이다. 그 집대성이, 어쩌면 유치하달 수 있을 마지막 지옥 장면일 것이다. 게다가 살로, 소돔 120일의 전조가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온다. 영화 장면에서 아래층을 향해 오줌 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오줌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 마시려고 아우성이다. 크게 웃으면서.

Uccellacci e uccellini

avril 12th,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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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와 참새(Uccellacci e uccellini)는 이탈리아어로 했을 때 말장난의 성격이 깊다. 발음이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새의 말단과 최고를 가리키는 의미도 있겠다. 또한 영화 속에 나오는 단테를 연구하는 치과의사들(dentisti dantisti)도 마찬가지가 되겠다. 제일 섬세함과 거리가 멀 수 있는 집단이 단테를 연구하는 것은, 참새와 매의 비유에 걸맞는다.

게다가 온갖 패러디와 연상작용이 많기는 하지만, 일단은 매와 참새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자도 중간 성격의 조류랄 수 있을 까마귀다. 친절하게도 영화는 이 까마귀가 팔미로 똘리아티(Palmiro Togliatti)가 죽기 전부터 좌파 지식인이었다고 설명해준다. 내용은 천주교도라면 익히 알 만한 설화…인데 좀 꼬았다.

Uccellacci e uccellini

원래가 성 프란체스코는 새들까지 교화(!)시킬정도로 신앙이 올바랐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성 프란체스코가 새와 대화를 할정도로 실성(?)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는 일종의 신앙심이다. 그리고 이 영화 속의 매와 참새 이야기 또한 매의 언어, 참새의 언어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 두 종족을 화해(!)시키는 데에는 실패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무엇을 상징할지는 누구나 알 만할 것이다. 혹시 파솔리니가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예언한 것은 아닐련지 모르겠다. 하지만 위 설화는 이 영화의 중심답게, 이곳 저곳, 까마귀처럼 안 끼는 곳이 없다. 채권자와 채무자와의 관계도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사이이고, 제 아무리 지식인 까마귀라 하더라도 인간과 까마귀 또한 화해할 수 없는 사이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루나를 둘러싼 모험(!)에서 보이듯 화해할 수 있는 사이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는 없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기 때문이다.

Credit 소개를 노래로 시작하는, 이 영화가 비단 위 설화만 얘기하지는 않는다. 기법상으로 펠리니와 채플린을 연상케하는 부분이 적지 않으며, 파솔리니 영화 이곳저곳에 많이 나오는 배우도 그대로 나온다. 사실, 이런 영화는 한 장면 장면, 한 대사 대사마다 하나 하나 짚어가며 해석하는 것이 제 맛이다.

그렇게 하면 너무 정성일스러워지나?